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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장 안 찍혔다" 김대중 투표도 무효처리…1971년 부정선거는 이랬다

약이되는 음식 2026. 6. 18. 18:51
2026. 6. 18.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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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4월 18일 서울 장충단공원 일대를 가득 매운 인파 앞에서 김대중 후보가 연설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박정희와 김대중은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 선거전에서 건곤일척(乾坤一擲)의 대결을 펼쳤다. 박정희는 5‧16 쿠데타 이후 집권 10년의 치적을 토대로 3선, 나아가 그 이후까지를 염두에 두고 관권과 금권을 총동원해 선거전에 임했다. 김대중은 야당의 새 바람 40대 기수론 경쟁에서 승리해 제1야당의 대선 후보를 거머쥔 여세를 몰아 젊은 패기와 능변, 참신한 비전과 정책들을 앞세워 돌풍을 일으켰다. 여기에 박정희 장기집권에 염증을 느끼고 정권 교체를 바라는 민심이 가세해 바람은 태풍급으로 거세지고 있었다.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와 대결한 김대중...80만 모인 장충단 유세

투표 9일 전인 4월 18일은 일요일이었고, 김대중의 연설회는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오후 3시부터 열릴 예정이었다. 아침부터 인파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낮 12시가 되자 공원 부지는 물론이고 퇴계로, 약수동, 한남동 고개에서 장충단으로 이르는 길목은 차도까지 메워졌다. 김대중은 회고록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오후 2시쯤에 신민당사(당시 종로구 안국동에 위치)를 나와 안국동 네거리에서 무개차를 탔다. 종로를 거쳐 장충단으로 가는데 수만 명의 인파가 내 차를 에워싸고 행진을 했다. 길이란 길은 사람들로 메워졌다. 차에서 내려 연단까지 진입하는데 한 시간도 더 걸렸다.”(김대중, ‘회고록1’, 삼인, 2011).

1971년 장충단 공원에서 열린 김대중 신민당 대선 후보의 선거 유세에서 부인 이희호 여사가 청중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있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바람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여권은 김대중의 장충단 연설회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일요일인 이날 공무원과 공공단체 직원들에게 가족 동반으로 전원 야유회에 참가하도록 하고, 불참자는 결근으로 처리했다. 고궁도 무료로 개방했다. 이날 서울 시내 창경원에서는 오후 1시부터 가수와 코미디언이 대거 출연하여 ‘봄맞이 벚꽃놀이 쇼’를 벌였다. 휴일임에도 향토예비군 비상소집이 있었고, 서울 시내 모든 극장은 무료로 입장하도록 했다(김대중, 앞의 책).

이런 조치들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지휘하는 회의체가 주도했다. 여기에는 내무부와 경찰, 검찰, 청와대 비서실장, 그리고 공화당 핵심 지도부가 참여했다. 박정희는 전 해 연말 온건하고 야무지지 못한 김계원 대신 주일 대사로 나가 있던 이후락을 중앙정보부장 자리에 앉혔다. 이후락은 박정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김충식, ‘남산의 부장들’. 폴리티쿠스, 2012).

 

이런 방해 공작 속에서도 김대중의 장충단 유세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 정권 교체에 대한 민심의 갈망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케 하는 열기였다. 이날의 인파 규모를 두고 최대 100만 명, 최소 50만 명 등 다양한 주장이 있지만 80만 명 정도라는 견해가 유력해 보인다. 이 정도 규모라면 제 3대 대선 때인 1956년 5월 당시 민주당 신익희 후보의 한강 백사장(현 동부이촌동 부근) 유세장에 모인 인파 30만 명의 두 배가 넘는 규모다. 당시 서울시 인구가 550만 명이었으니 서울시민 7명 중 1명 꼴로 유세장에 나간 셈이다.


박정희 장기집권에 대한 염증...40대 김대중에 대한 기대감

김대중의 장충단 유세는 그 내용도 내용이지만 규모 면에서 당시의 시대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 배경을 몇 가지 꼽아볼 수 있다. 우선 박정희 장기집권에 대한 피로감이다. 박정희가 추진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과로 인한 경제성장의 공이 있었지만 무리한 3선 개헌 강행 등으로 권위주의 정권의 장기 집권에 대한 염증이 국민들 사이에 상당했던 것이다.

둘째로 김대중이라는 정치 신상품의 참신성과 기대감이다. 당시 야당 지도자들은 60~70대 원로들로 노쇠하고 무기력하다는 느낌을 주었는데 40대 기수론 경쟁을 통해 등장한 김대중은 젊고 말을 잘하며 비전과 정책을 제시한다는 점에서도 일반 국민들의 높은 관심을 끌었다. 대중경제론과 4대국 안전보장을 통한 한반도 평화와 통일 비전 제시, 향토예비군 폐지, 노동자 권익 향상 등이 그것이다.

1971년 7대 대선에 출마한 김대중의 선거 포스터. 김대중평화재단 제공

셋째, 산업화의 진행으로 1970년대 초에는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리는 이농이 가속화하면서 서울은 급속하게 팽창했다. 농촌에서 올라온 젊은층, 대학생, 신흥 사무직이 늘어나면서 중산층도 확대됐다. 이들은 산업화의 혜택도 봤지만 억압적인 정치와 통제, 부정부패, 열악한 근로조건 등에 분노하면서 변화를 갈구하고 있었다.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봉제 공장에서 일하던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며 분신했던 것이 1970년 11월, 불과 5개월 전의 일이었다.

이런 다양한 상황이 1971년 4월 야당 대통령후보 김대중의 유세가 열리는 장충단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았던 것이다. 연단에 선 김대중은 열정을 불태워 연설을 시작했다.

 

“서울 시민 여러분! 나는 그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습니다. 지금 전국서는 모든 국민들이 ‘이번이야말로 기어이 정권 교체를 이룩하자’고 경상도에서 전라도에서 충청도에서 강원도에서 궐기했습니다. 나는 전국 유세 결과 필승의 신념을 가졌습니다만 오늘 여기 장충단공원의 백만이 넘는, 대한민국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에 그 유례가 없을 이 대 군중이 모인 것을 보고, 서울시민의 함성을 보고 이제야말로 정권교체는, 우리의 승리는 결정이 났다는 것을 나는 여러분 앞에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김대중은 이어 “이번에 정권 교체를 하지 못하면 이 나라는 박정희 씨의 영구 집권의 총통시대가 오는 것”이라고 경고한 뒤 중앙정보부 폐지, 지방자치제 실시, 향토예비군과 교련 폐지, 육성회비 폐지, 부정부패 일소, 대중경제 실시 등을 약속했다.

이날 장충단 공원 일대는 함성과 환호로 뒤덮였다. 김대중은 “독재에 대항하는, 민권이 살아 있음을 보여준 거대한 축제였다. 나에게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감격이었다”고 회고했다(김대중, 앞의 책).

유세는 오후 6시 30분쯤 끝났지만 일부 참가자들은 동대문, 종로를 거쳐 광화문까지 가두 행진을 펼쳤다. 연도의 시민들까지 가세해 시위대로 변한 청중들이 종로 3가 단성사 앞에 이르렀을 때는 1만 명에 달했고, 유세장이 아닌 서울 도심에서 “정권교체” “김대중” “공명선거, 3선 반대” 구호를 외쳤다. 시위대는 광화문 근처에서 기동경찰대가 최루탄과 페퍼포그(pepper fog)를 쏘며 제지하자 밤 9시가 넘어 해산했다.

1971년 김대중 후보의 유세장에서 나온 인파들이 도로로 행진하고 있다. 을지로6가~장충단의 큰 길이 인파와 차량으로 가득하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대중 바람에 놀란 박정희...장충단 군중 동원 작전

이날 박정희 후보는 대구 수성천 변에서 유세를 했다. 박정희와 여권 수뇌부는 김대중 후보의 장충단 유세 상황을 보고 받고 경악했다고 한다. 박정희 후보도 1주일 후인 4월 25일 장충단에서 유세할 예정이었다. 투표 이틀을 남기고 박 후보의 마지막 유세로 대미를 장식해야 했다. 여권에서는 김대중 후보 유세에 못지않은 인파를 동원하기 위해 비상이 걸렸다.

1971년 4월 7대 대통령 선거 유세장에서 박정희 공화당 후보와 육영수 여사가 청중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00만 군중 동원을 목표로 막대한 자금이 뿌려졌다. 여당의 군중동원 대책팀은 시내버스, 트럭, 관광버스를 이용해 공무원, 기업체 직원, 통‧반장 등을 실어 날랐다. 이때 대책팀은 한가지 아이디어를 냈다. 차량으로 실어 나른 인파를 시내 중심부에서 하차하도록 해 장충단으로 가는 길은 도보로 이동한 것이다. 엄청난 인파가 장충단공원으로 향하는 모습을 연출함으로써 서울시민들에게 과시하는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였다. 공무원, 기업체 직원을 동원하는 한편 또 유명 음향업체에 맡겨 장충단에서 남산 서쪽 능선 야외 음악당까지 수십 개의 스피커를 설치했다. 남산 서북쪽 일대가 온통 박정희 후보 유세 음향으로 뒤덮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김충식, 앞의 책).

이렇게 동원한 군중 규모가 김대중 유세 때보다 훨씬 적었다는 평가도 있고 거의 필적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어쨌든 군중동원에 의한 박정희의 장충단 유세는 성공적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박정희의 당시 연설 녹음을 들어보면 카랑카랑하고 밋밋한 목소리여서 청중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효과는 떨어졌지만 차분한 논리로 나름 설득력을 준다.

1971년 4월 25일 서울 장충단 공원에서 열린 공화당 박정희 후보 유세에 참석한 인파. 나무 위에 올라간 사람들도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그는 특히 김대중 후보가 주장한 영구집권은 사실무근의 흑색선전이라고 일축하고 자신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준다면 “이번이 마지막 출마가 될 것”이며 퇴임 후를 대비해 당내 후계자를 양성하겠다고 배수진을 쳤다.

“야당은 총통제니 뭐니 해서 내가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언제까지나 집권할 것 같이 허위 선전을 일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3선 개헌 때 국민투표로 한 번만 더 할 수 있도록 여러분이 허락한 것이지 몇 번이고 해도 좋다고 지지한 것은 아닐 것이며, 여러분이 나를 다시 뽑아주면 이 기회가 나의 마지막 정치연설이 될 것입니다(김진배, ‘김대중 수난사 인동초의 새벽’, 도서출판동아에서 재인용).

박정희의 장기집권에 대한 비판 민심이 팽배한 상황에서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박정희의 선언은 다음해 유신 강행으로 공수표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이 선언은 박정희의 3선 성공에 상당한 플러스가 되었다. 국민들은 박정희 후보의 이 선언을 3선 후에는 은퇴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였고, 언론들도 같은 의미로 대서특필했다.

박정희 후보의 ‘마지막 출마’ 선언은 어렵게 이루어졌다. 당시 여권 안팎에는 박정희가 이번이 마지막 출마라고 선언하기 전에는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하지만 박정희 후보에게 이야기를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눈치를 보다가 이후락 정보부장이 박정희의 대구사범학교 동기로, 허물없이 지내는 서정귀(작고, 전 호남정유 사장)씨를 동원해 가까스로 승낙을 받았고, 선거 마지막 유세에서 ‘이번이 마지막 출마’ 선언이 이루어졌다고 한다(김충식, 앞의 책).


불법과 부정, 관권과 금권이 판친 선거...박정희의 94만표 승리

선거가 후반으로 접어들자 불법과 부정행위가 기승을 부렸다. 관권과 금권이 판을 쳤다. 그 핵심 배후는 이후락의 중앙정보부였다. 위기의식을 느낀 김재준, 이병린, 천관우, 남정현 씨 등 각계 지식인 60여명이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고 선언문을 채택했다. ‘이번 선거에서 반민주적 부정불법을 감행하는 것은 역사의 범죄로 이를 민족의 이름으로 규탄한다’ ‘국민 각자가 이번 선거에서 권력의 탄압과 금력 기타 모든 유혹을 일축하고 신성한 주권을 엄숙히 행사할 것을 촉구한다’ 등의 내용이었다.

여권의 망국적인 지역감정 선동도 노골적이었다. 이효상 국회의장은 “신라 천년 만에 나타난 박정희 후보를 다시 뽑아서 경상도 정권을 세우자”고 선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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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성 전 한국일보 논설위원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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